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닉슨 (문단 편집) == 한국과의 관계 == >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, 그리고 [[이승만]]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. 나도 역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예측 불가능한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을 많이 되새겨 보았으며, 이 노(老) 정치가가 얼마나 지혜로웠는가를 더욱 새롭게 인정하게 됐다. >---- >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의 회고록 中 당시 [[박정희]] 정부가 전임 대통령인 [[린든 B. 존슨]] 행정부와는 괜찮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냉랭한 편이었다. 닉슨이 주지사 선거까지 낙선하고 야인 시절 전 세계를 돌아다닐 때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. [[박정희]]는 그를 '끝난 사람' 취급하고 오찬 대신 [[커피]] 한 잔 대접하고 쫓아내 버렸는데[* 이런 냉랭한 대접에 주한 미 대사는 급히 장관들과의 만찬을 추진했는데 박정희는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저녁을 해버렸다고 한다. 출처는 이동원이 쓴 '대통령을 그리며'(고려원, 1992, 146~147쪽)에 나온 내용을 [[강준만]]의 '한국 현대사 산책' 1970년대편 1권(33쪽)에서 재인용했다.], 1969년 닉슨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이 되자 상황은 순식간에 뒤바뀌어 버렸고 68년 한때 30만에 달했던 베트남 파병으로 인한 한국의 외화수익이 닉슨의 베트남 철수로 인해 직격탄을 맞았고, [[68혁명]]에도 기술된 남북관계 급냉각으로 인한 박정희 정권의 위기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한국 정부와 협의 없이 주한미군 7사단을 그냥 철수시켜버리는 등[* 주한미군 역사상 진짜로 주둔군 규모가 감축된건 이때 뿐이다.] 제대로 역풍을 맞는다. 이 때문에 다급해진 박정희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[[백악관]]이 아닌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만나야 했고, 저녁 식사 때에는 자기 고향 친구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했다. 국가 정상끼리의 저녁이 아니라 친구들과의 모임에 끼워준 모양새의 굴욕인 셈이다.[* 역시 강준만의 책(34~35쪽)에서 이동원의 책(147~148쪽)을 재인용한 내용이다.] 애초에 일국의 부통령이었던 사람을 정치적으로 사망했다고 해도 푸대접하는 건 엄연한 외교적 결례였고 앞날까지는 볼 수 없다 치더라도 조심스럽지 못한 처사였다. 이때 급속도로 냉각된 박정희와 닉슨간의 관계때문에 박정희가 자주국방을 외치며 핵개발 카드까지 만지작거리면서 당시 수출경제의 호황과는 별개로 한미관계는 극도로 심각하게 악화되고 그 여파가 [[지미 카터]]시대까지 이어진다. 그래도 닉슨 본인은 한국에 애정이 있었는지 한국을 꽤 여러번 방문했다.[* 동 시기에 아시아 순방도 여러번 한 것을 보면 아마 닉슨이 아시아 정세에 꽤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.] 1953년 부통령 시절을 최초로 해서 1993년까지 무려 40년에 걸쳐 꾸준히 방한하였다.[* 그런데 정작 그는 대통령으로서 재직할 때는 한 번도 방한하지 않았다. 방한했을 때 그는 부통령, 개인, 전 대통령 자격으로 한 것이다.] 어떻게 보면 한국 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한데 이승만, 박정희, 전두환, 노태우, 김영삼 대통령을 직접 만나 본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다. 거기에 순정효황후까지 만난 적이 있었다. 1993년 방한했을 때 "내가 한국을 여러번 방문했는데 문민 대통령은 참 오랜만이다.", "경제 기적과 정치 개혁을 모두 이룬 한국을 보니 자랑스럽다."며 뼈 있는 농담과 덕담까지 해줬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